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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음울한 기운을 품고 있다. 기본적인 스릴러 공식은 모조리 풀어헤쳐 놓으면서도 긴장의 끈은 계속 유지된다. 생소하다 싶을 정도로 오프닝은 짧고 당황할 간극도 없이 곧바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어디에서 본듯 하지만 보지 못했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그가 배트맨을 만든다는 소식은 그의 팬이라면 관심이 저절로 갈 수밖에 없었던 소식이다. 과연 그는 프랜차이즈 시리즈인 배트맨을 이전 네 번의 작품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기를 원했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 새로운 작품이 되기를 바랬을까. ![]() 해답은 간단히 제목에서 알 수가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작품이 다섯 번째 시리즈임을 감안하지 않은 채 출발지점을 기원전으로 삼는다. 다섯 번째 배트맨은 다시 돌아오지도(Return), 영원하지도(Forever), 누구와도 동행(Robin)하지도 않는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섯 번째 배트맨은 이전 시리즈와의 단절을 시작(Bigins)이라는 말로 매듭지으면서 이전 배트맨은 잊을 것을 당부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한 인터뷰에서 “그동안 4편의 배트맨 시리즈가 나오면서 한번도 그가 배트맨으로 변화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면서 거기에서 착안점을 얻었다고 했다. 어떻게 배트맨이 되었느냐, 놀란 감독은 여기에서 그만이 가지고 있는 음울한 스릴러의 아우라를 대비시킬 접촉점을 찾은 것이다. 그는 곧바로 이 의문을 ‘브루스 웨인’이라는 인물 자체가 가지는 히스토리를 건드린다. ‘기억’과 ‘죄의식’ 놀란은 전작 <메멘토>와 <인썸니아>를 통해 스릴러라는 장르안에서 독특한 고지를 지켜왔다. 그의 작품들은 늘 음울한 스릴러의 아우라를 갖으며 이를 표현하는 데에는 불안한 인간군상들을 이용해 왔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불안한 기억에 쫓기고 죄의식에 괴로워하는 모습들을 자주 내비친다. 히뿌연 기억 언저리를 맴돌아 10분만 기억하는 인생이 되어버린 <메멘토>의 수사관 레너드는 오직 범인을 찾기 위해 모텔 주변을 맴돈다. 그것은 부인을 살해한 범인을 찾는 데에 치명적인 약점이며 이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몸에 문신을 해 가냘픈 기억끝자리를 기억해 내는 방법뿐이다. 10분 간격으로 긴장과 이완을 반복적으로 이끌어내는 메멘토는 집요할 정도로 치밀하게 살해범의 뒤를 쫓는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부인을 살해했다는 것을 기억해냈을 때에 그의 죄의식은 갈 곳을 못 찾는다. ![]()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늘 무언가에 쫓기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 원인은 ‘기억’이다. <메멘토>의 레너드는 부인을 살해했다는 죄의식으로 기억을 저당 잡히고 <인썸니아>의 도머는 동료를 살해한 기억이 연쇄살인범을 잡아야 하는 사명감으로 나타나고 이를 통해 죄의식에서 벗어나려 한다. ![]() 브루스 웨인의 부모가 죽게 된 원인은 자신이 오페라극장을 나가게 해달라는 박쥐공포증에 대한 기억이었다. 부모가 거리 부랑자에게 살해당하자 그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죄의식은 내내 그의 삶을 옭아맨다. 박쥐에게 공포심을 느낀 기억은 이제 그것자체를 덧입음으로서 극복해 낸다. 또 부모가 살해당한 원인 또한 다른 곳에 닿아있음을 알게 되면서 그가 헤쳐가야 할 죄의식을 극복할 대상은 고담시를 지배하는 악당들이 되어 버렸다. 재미있는 점은 이 기억과 죄의식의 아우라는 <배트맨 비긴즈> 주인공인 크리스챤 베일이 직전에 찍었던 <머쉬니스트>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잠이 들지 못한다는 것과 반역된 인물의 환영, 그리고 끊임없이 기억을 지우려하는 것까지도 닮아 있다. 어떤 작품속에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표현해 낼 수 있는 독특한 시각으로 인물을 해석해 내는 능력. 놀란 감독의 다음 행보가 무척이나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이 포스트는 더 이상 덧글을 남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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