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e0083.egloos.com

푸르미 세상

포토로그



37. <이터널 선샤인> 사랑했던 기억을 지우시겠습니까 맘대로 씨네마

‘기억’은 영화 속에서 다양한 방면으로 쓰인다. 범인을 추적하기 위해 10분간만 ‘기억’을 간직하기도 하고(메멘토),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해석을 위해 거짓‘기억’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공각기동대). 기억이 영화 소재로 적절한 이유는 분명 ‘사실’이 존재하지만 ‘해석’은 각기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났다는 사실이 두 사람에게 똑같이 행복한 기억으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한사람은 행복했지만 한사람은 불행한 기억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기억은 감정과도 연관되어 있다. 기억이 행복했는가, 아니면 불행했는가는 스스로 결정하고, 그것을 간직하려는 의지는 감정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결국 ‘감정’에 따라 기억의 생사는 달라진다.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했던 기억을 지우려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조엘(짐 캐리)은 여자 친구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이 자신과 사랑했던 기억들을, 정신치료 과학자 미어즈위크 박사의 실험 과정을 통해, 머릿속에서 모두 제거했음을 알고 적잖게 놀란다. 조엘은 자신을 보고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는 그녀가 너무도 밉다. 절박한 심정에 미어즈위크 박사를 찾아 자신의 머릿속에서도 클레멘타인과 관련된 기억들을 지워줄 것을 요청한다.

어둑한 방에서 기계를 뒤집어쓰고 삭제시작과 함께 잠이 드는 조엘. 자신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 조엘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하나씩 떠올린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클레멘타인을 잊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되고, 삭제과정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영화의 각본가인 찰리 카우프의 전작이 <존말코비치되기>였음을 상기해 보면, <이터널 선샤인>이 선사하는 상상력도 평범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존말코비치가 될 수 있었던 작은 문은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기계가 대신한다.

영화는 ‘기억’이 가지고 있는 단편적인 대화나 사건들을 조금씩 나열해 가면서도 ‘사랑’의 감정선이 부서지지 않을 만큼 각각 적절한 플롯을 만들어낸다. 생생하지만 앞뒤 연결이 잘 맞지 않는 꿈속 장면을 재현하듯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나누는 대화는 그들이 행복했던 한 때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영화는 기억이라는 비현실적 현상을 극적으로 보여주는데 상당한 내공을 자랑한다. 기억을 유지하려는 비현실속 조엘과 기억을 지우고 있는 현실속 상황을 쫓고 쫓기는 스릴러식 구성으로 풀어내며 긴박감을 선사한다. 조엘과 대화를 나누다 모퉁이를 돌아간 클레멘타인이 갑자기 사라지고, 고개를 돌리면 그녀가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가버리는 장면들이 연달아 등장한다. 또 자동차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차가 지워지고 울타리가 하나씩 사라져 버리면서 기억이 조금씩 사라지기도 한다. 흔들리는 카메라와 긴박한 음악은 서늘한 느낌을 선사하며 더욱 영화 몰입을 부채질 해 준다.

영화는 조금씩 지워지는 기억을 부여잡으려는 조엘의 몸부림을 통해 한사람과의 추억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말한다. 그래서 기억의 한 부분 삭제가 끝나갈 때마다 마지막까지 기억하고 싶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조엘은 그래서 애절하고 안타깝다.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속에서 완전히 잃게 되는 비현실적이지만 슬픈 이야기인 <이터널 선샤인>이 그려내는 것은 남녀의 단순한 만남과 이별의 과정이 아닌 사랑이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형상 그 자체다.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랑의 인력을 ‘기억’이란 소재를 통해 풀이한 것이다.

비현실적임에도 <이터널 선샤인>이 전하는 사랑이야기에 빠질 수 있는 것은 조엘을 연기한 짐케리의 처연한 연기덕분이다. 영화 내내 거친 수염과 정돈되지 않은 머리가 나타내는 혼란과 불안, 그리고 안정의 정서를 잘 표현해 낸다. 심연의 눈빛으로 클레멘타인을 보고 있는 짐케리를 보고 있노라면 그가 노란 가면을 쓴 <마스크>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은 믿겨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의 장난기는 삭제과정이 잘못돼 기억 뇌파를 벗어나 어린시절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잠시 돌출되기도 한다.

굵은 연필로 쓴 글씨를 지우개로 지운 자국처럼 희미하지만 알아 볼 수 있는 기억의 파편은 결국 두 사람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끈다. 처음 봤지만 전에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데자뷰 현상처럼 지워진 기억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

사랑의 불완전하지만 다시 회복하게 되는 순환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는 이야기 구조의 변화도 꾀한다. 영화속 오프닝은 영화가 시작한 뒤 수 십분 뒤에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이야기의 시작지점이 영화시작 뒤 수십분 뒤이기 때문이다. 영화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기억이 삭제된 후에 일상이다. 또 기억 속 조엘과 기계를 쓰고 누워있는 조엘, 그러니까 기억속 장면과 현실속 장면이 확연한 나눔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여기에 기억삭제 담당의사(톰 윌킨스)와 간호사(커스틴 던스트)사이에 비밀까지 겹쳐지면서 사랑의 회복이라는 주제는 더욱 선명해 진다. 그래서 미래와 과거, 현실과 비현실을 자주 오고가는 <이터널 선샤인>은 종종 빠른 전환 때문에 극의 흐름을 놓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엘이 ‘okay’라는 말을 건내고 나면 혼잡했던 흐름과 지우려했던 기억들도 모두 설명이 필요 없어진다. 중요한 건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감정, 그것이 모든 것들을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이터널 선샤인>의 결론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덧글

  • FAZZ 2005/10/27 15:57 #

    설명을 듣고 있으니까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 박건일 2005/10/27 17:27 #

    <이터널 선샤인> 너무너무 좋아요! 글 읽고나니 다시 보고 싶어지네요. 주말에 DVD를 다시 봐야겠어요. 글 잘 읽었습니다. :-)
  • 정으니 2005/10/27 18:28 #

    재미있었으면서도 보면서 꽤나 혼란함을 느꼈었던 것 같아요.
    무지 공감하면서도 왠지 모르는 것 같은 느낌,
    아마도 아직 사랑을 몰라서 그런가봐요.
  • 푸르미 2005/10/28 00:20 #

    FAZZ / ㅎㅎ 감사합니당. 한번 보세요. 상당히 독특하기도 하면서도 재미있어요. 짐케리 변화가 참 놀라워요.

    박건일 / 저도 참 좋아요. 다시 보니까 몰랐던 게 다시 보이더군요. 역시 이 영화는 두번을 봐야하나봐요.
  • 푸르미 2005/10/28 00:21 #

    정으니 / 저도 조금 헛갈렸는데, 참 잊을 수 없는 게 사람아닌가 싶어요. 굉장히 괜찮은 느낌이었어요.
  • lunamoth 2005/10/28 00:42 # 삭제

    "불완전한 형상",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랑의 인력" 두 글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개봉하면 다시 볼 생각입니다 ;)
  • 푸르미 2005/10/28 11:53 #

    lunamoth / 안녕하세요. 감사해요 인상적으로 봐주셔서...
  • _푸훗_ 2005/10/29 19:34 #

    정말 멋진 영화였어요. 사랑에 대해 판타지로 이야기하면서도 너무나 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숨이 막힐 정도로 슬펐던, 가슴 속에 무거운 돌이 들어선 기분이었어요. 영화를 보고 나니. 푸르미의 영화평도 역시나 멋지고요. 방긋.
  • 푸르미 2005/10/30 20:03 #

    _푸훗_ / 가슴속에 무거운 돌이 들어선 기분. 크~ 멋져요. 진짜 멋있었어요. 짐케리도 그렇고... 히히... 제 영화평도 멋있었단 말에 기분 업업!! 고마워요~
  • 다마네기 2005/10/31 12:44 #

    ㅎㅎ 저도 이영화 꼭 보고 싶어지네요.
    자신의 글 (푸르미님의 글) 이 다른 사람에게 (다기에게 ) 어떠한 동기 부여가 된다는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든다는 ) 사실. 넘 멋지지 않나요? ^^
  • 푸르미 2005/10/31 19:28 #

    다마네기 / ^^ 와아~ 기분좋은 칭찬을... 정말 보람까지도 느껴지는 말이에요. 네. 막막 자랑스러워지는 기분이 ㅎㅎ 칭찬 진짜진짜 감사합니당.^^ 오늘도 살짝 기분 업업! 되네요.
  • 에우 2005/11/01 13:15 #

    지우고 싶을 만큼, 특별한 사랑.- 그런 사랑을 다시 저에게 기억시켜준 영화죠.- 작년에 개봉을 기다리다 어둠의 통로로 접한 영화.-

    추억은 서로의 마음에 정말 다르게 쓰여져 가는 것 같습니다.
  • 푸르미 2005/11/01 14:00 #

    fks / 그런데 좀 무섭지 않을까요 ^^

    에우 / 그런거 같네요. 다르게 쓰여지는 것. 누구에게는 쓰린 기억이지만 누구에게는 행복했던 기억으로 말이죠.
  • 한나 2005/11/19 20:57 #

    포스팅 보니 꼭 봐야겠다 싶어서 내일 이 영화 보러갑니다. ^^ 기대 기대~
  • 푸르미 2005/11/19 22:04 #

    한나 / ㅎ 네 꼭 한번 보세요. 재미있담니다.
※ 이 포스트는 더 이상 덧글을 남길 수 없습니다.



클립

E-Mail : blue0083@daum.net
Messenger : blue0083@nate.com
한겨레21
트리플크라운
듀나
뉴타입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