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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자본 투자, 한국형 블록버스터, 남북한 분단 상황, 가족, 두 남자. 영화 <태풍>을 수식할만한 단어들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위 단어들은 <쉬리>와 <태극기를 휘날리며>에 대입해 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세 영화는 만들어진 해에 가장 높은 제작비를 쏟아냈고, 남북한 분단 상황과 가족을 소재이자 주제로 내세웠으며, 영화를 지탱해 주는 가장 큰 캐릭터로 두 남자를 택했다.
그런면에서 보면 영화 <태풍>은 <태극기를 휘날리며>보다도 <쉬리>와 닮아있다. 탈북자 혹은 북한 군인으로 설정되는 남한에 적대적 이념을 가진 테러리스트, 그리고 이를 막으려는 남한의 경찰 혹은 군인. 그들 사이를 배외하는 한 여성의 개입, 마지막에 이르러 남북분단 상황 안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한국적 상황의 전개까지 <태풍>의 설정은 일면 <쉬리>의 확장판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비슷하다. 하지만 그 확장의 영역은 해외 로케이션과 화려한 볼거리에 단순히 머물고 만다. ![]() <태풍>은 <쉬리>가 뿜어냈던 감성적인 영역에서 상당부분 부족한 면모를 보인다. 영화에서 인물에 집중도는 얼마나 입체적으로 갈등구조를 만들어내고 그안에 자신만의 히스토리를 간직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적도 친구도 될 수 없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종종 부족한 서사를 드러내는 데에는 부족한 히스토리를 가진 인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씬'은 착한 아이였기 때문인가 <태풍>과 <쉬리>의 두 남자들을 견주어 보자. 씬(장동건)과 박무영(최민식)은 남한의 체제를 무너뜨리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핵과 시한폭탄을 무기로 사용한다. 이들이 겪는 갈등은 동일한 민족의 사람으로서 남한 사람을 살해하게 된다는 기본적인 죄책감, 그리고 남한사회에서 겪게 되는 스스로에 정체성에 대한 갈등이다. 선과 악의 뚜렷한 갈림길이 희미한 상황에서 북한과 남한 사이의 괴리감은 이 인물들이 겪게 되는 현실과 이상의 차이와 같으며 이 갈등은 이 인물들이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원천이 된다. 이를 위해 <태풍>에서 씬의 탈북과정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누이와 가까스로 북한을 탈출한 과정은 그가 남한을 응징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가 외교관의 심장에 칼을 꺾어 꽂아버릴 정도로 분노하는 것은 단적으로 씬의 남한에 대한 복수를 설명해 주는 구실이었다. 그런 그가 누이를 만나면서 갑자기 급격한 감정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나중에는 남한 군인인 강세종에게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나면...”이라는 말까지 하게 된다. 씬이 매력적인 악당으로 보이지 않는데에는 그가 결정적으로 심경이 변화하게 되는 계기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물이 영화에서 변모하는 데에는 일종의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일례로 <킹콩>에서 킹콩이 엔에게 감정을 교감하는 데에는 같이 석양을 바라보았다는 경험과 경극에 가까운 앤의 춤사위를 보고 즐거워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태풍>에서 씬의 감정적인 변화에는 특별한 계기가 없다(누이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누이는 이전부터 만나려 했던 것이며, 만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남한정부에 배신당하는 경험까지 얻게 된다). 그에 대한 설명을 단순히 누이의 "원래 착한아이였어요"라는 말로 치부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 '강세종'이 변심하는 이유는 어디에 강세종(이정재)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해군에게 임무를 맡기려면 돈이나 직업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오직 국가에 얼마나 중요한 사항인지만 이야기하면 될 겁니다.” 라면서 입가에 미소 한 번 짓지 않던 100% 순수 민족주의적 군인인 그가 마지막에 이르러 급작스런 변심을 하게 되는 과정은 영화속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강세종이 태풍호의 진입시에 상관의 명령을 어기고 국가적 임무에 충실할 것을 다짐할 때에, 그리고 태풍호에 승선해 씬에게 갑자기 함께 가자고 말할 때에, 앞뒤가 맞지 않는 심경의 변화는 '타고 내릴 때 말이 다르다'는 속담으로 밖에 해석될 수 밖에 없다. 강세종을 <쉬리>의 유중원과 비교해 보면, 둘의 원래 임무는 같다. 테러리스트들을 막아야 하고 국가적안보를 지켜야 한다. 제거해야 할 적과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보다도 뚜렷한 남한의 엘트들은 갈등의 영역이 극히 적다. 하지만 <쉬리>는 영민하게도 ‘이명현’이라는 인물을 끌어와 새로운 갈등을 덧입힌다. 뚜렷한 적이었던 북한 테러리스트를 사랑한 남한의 엘리트 정부요원의 갈등은 영화의 주제를 설파해 주는 충분한 구실이 된다. 하지만 <태풍>의 강세종은 씬의 누이를 만나 씬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이 갈등의 전부이다. 강세종은 누이를 데려가는 씬을 쏘지 못하고, 같이 투항하자며 씬을 설득하려는 인물이지만 그에게서 이같은 행동을 유발하게 하는 원인을 영화는 제공하지 않는다. 그저 다분히 같은 민족, 같은 핏줄이라는 상투적인 관념일 뿐이다. ![]() 두 인물에 대한 부족한 설명과 입가에 미소조차 지을 수 없이 빠듯하게 돌아가는 서사구조. 여기에 시종일관 장엄하기만 한 음악에 이르기까지 <태풍>은 잔득 긴장의 끈을 다잡다가 지쳐가는 형국에 가깝다. 여기에 강세종과 국가사령관들에게서 보여지는 국가우선주의적 시선(누이와 만난 씬을 죽이라는 명령, 미군 잠수함 때문에 태풍 승선을 포기하라는 명령)에 큰 갈등없이 무마해 나가는 과정들은 다소 논란의 여지까지 남겨두고 있다. <태풍>은 이전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해상장면의 컴퓨터 그래픽이나 해외 로케이션의 적절한 조화, 짧지만 인상깊은 카레이싱 장면 등 화려한 볼거리를 가졌음에도 서사안에 인물들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 태풍의 위력이 나날이 약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화려한 볼거리 안에 부족한 서사와 인물들의 이질감이 확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 이 포스트는 더 이상 덧글을 남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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