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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백인이다. 별 이유 없이 거리에 세워둔 차를 강도에게 빼앗겼다. 강도는 흑인이었다.
나는 흑인이다. 차를 운전하다가 갑자기 불신검문을 하는데 내 몸을 경찰이 더듬었다. 경찰은 백인이었다. 나는 중동 출신 상점 주인이다. 밤중에 도둑이 들었다. 갑자기 어제 와서 불평하던 멕시코인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흑인이다. 직장 동료 백인 여자를 사랑하지만 그녀와 결혼할 생각은 없다. 그녀는 백인이기 때문이다. ![]() 사무치고 치가 떨리게 특정 사람들을 증오하게 되는 연유는 대게 특정한 사건과 관련한 끔찍한 경험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인종 차별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피해를 당한 당사자들의 기억 속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인종 차별을 구체적으로 실행해 옮길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리에서, 좁은 골목에서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들을 보게 되면 그들은 순간적인 경직되거나 괴롭히기 위한 준비를 한다. 이들에게 인종 차별을 하게 된 이유를 묻자면 그들은 하나같이 피해자였다고 말한다. ‘그들이’ 차를 훔쳤고, ‘누군가’ 내 상점을 털었으며, ‘그녀석이’ 허름한 옷차림으로 내 차를 탔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이 말 앞에는 흑인, 유색인종이라는 더 큰 꾸밈말이 생략돼 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각본가 폴 해기스는 여덟 커플의 일상 속으로 들어간다. 하나씩 어긋나기 시작하는 사건들을 찬찬히 관조하면서, 미국 내에 뿌리 깊은 유색인종 차별의 실제들을 영화는 뜯어내 보인다. 적나라한 대사들과 흑과 백, 중동, 멕시코, 한인 등 여러 인종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피해를 당한 이야기와 현실, 그에 대한 복수로 이어지고 때로는 경험되지 않은 차별이 살해로 이어진다. ![]() “<크래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와 똑같은, 그래서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착한 사람들에 대한 영화이다. 인종이나 계급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stranger)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이다.” 폴 해기스 감독의 말처럼 실제로 영화에서 가해하고 가해 받는 이들의 피부색을 벗겨 놓는다면 <크래쉬>는 범죄사건 사고 현장을 드라마로 만들어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같다. 차별의 이유는 그저 다른 색을 가진 인종이기 때문이다. <크래쉬>가 여덟 커플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그들의 관계를 긴요하게 엮는 것은 그것이 우리네가 사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현실이며, 사람들 무의식 속 뿌리 깊게 자리 잡힌 차별 의식이라는 것. <크래쉬>는 미국 현실의 보고서이면서 인종차별의 시작이 실핏줄처럼 긴요하게 엮어지는지를 그대로 상현해 낸다. 영화는 결국 인종 차별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없다고 말한다. 다만, 서로를 같은 사람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당연한 결론 아니겠냐고 반문 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큼 차별을 이길만한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영화의 결말은 온당하다. ![]() 비단 <크래쉬>가 별반 먼 나라 이야기로만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 사회 속에서도 그 차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나오기 때문이다. 한 외국인 노동자가 강도로 변해 회사 물건을 훔치자, 회사내에서 앞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한국 중소기업 사장이 털어놓는 속내는 <크래쉬>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도둑질한 그 사람의 잘못이었다고 질타할 것인가, 아니면 동남 아시아인들의 천성이라고 할 것인가. 한 사람에 대한 차별의 기억은 엉뚱하게도 같은 피부를 가진 인종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진다. 차별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알면서도 차별에 대해 별반 감정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 <크래쉬>는 우리네 사회 구석에서 언제나 꿈틀대고 있는 차별과 이해의 부족에 대한 일상의 형상을 찬찬히 그려내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미국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소위 잘 살고 있다는 나라들이 겪고 있는 실제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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