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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 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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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 넘게 본 애니메이션이 있습니다. 횟수로 따지면 몇 번 안 되지만 시간으로 따지면 족히 아홉 시간은 넘습니다. 20분짜리 TV시리즈로 26회분량이니까요. 질릴 만도 하지만 매번 볼 때마다 느낌이 다릅니다.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눈을 봐. 사고로 없어져서, 만들어 넣은 거야. 그때부터 나는 한쪽 눈으로는 과거를, 그리고 다른 한쪽으로는 현재를 보지. 눈에 보이는 것만이 현실은 아냐, 그렇게 생각했어. 깨지 않는 꿈을 보려했지. 하지만, 어느샌가 깨버린 거야.” 한 번 듣고선 이게 무슨 말인지 알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아마 <카우보이 비밥>의 한 에피소드만 본다 해도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만화인지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그 다음 에피소드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등장인물은 똑같은데 갑자기 코미디 만화가 됩니다. 그 다음 편을 보면 이번에는 스릴러 만화로 둔갑합니다. 주인공은 똑같지만 분위기는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이 만화의 장르를 나누라고 하면 난감합니다. 마음대로 장르를 넘나들고 색깔을 바꾸는 <카우보이 비밥>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장르들을 각기 에피소드에 배치해 놓습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들은 기묘한 앙상블을 이룹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장르 그래서 <카우보이 비밥>을 요약할 장르도, 딱히 요약할 수 있는 줄거리도 없습니다. 주요 등장인물은 이렇습니다. 중국계 마피아 간부였던 스파이크, 경찰이었던 제트, 도박을 좋아하고 몇 백년간 냉동인간이었던 여자 페이, 부모를 떠나온 천재 해커 10대 소녀 에드와 천재 강아지 아인. 이들은 주인공이지만 때로는 조연에 불과하기도 합니다. 매회마다 이 네네 사람과 개는 등장하니 굳이 줄여보자면 ‘네 사람과 한 마리의 개에 관한 이야기’라고 축약할 수는 있겠습니다. ![]() 그들의 직업은 사냥꾼 헌터입니다. 우주선을 타고 다니고 여러 행성들을 여행하면서 현상금이 걸린 범인들을 좇습니다. 우주선을 타고 다니니 은하철도 999처럼 신기한 외계 행성의 모습을 볼 만도 합니다. 그러나 <카우보이 비밥>에 등장하는 행성들은 지구와 똑같은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막이 있는가 하면 어지러운 홍콩 번화가 거리가 있고, 놀이공원이 있는가 하면 항구도시 속 맥주바가 있습니다. 마치 우주 어디를 가도 사람 사는 모양새는 다 똑같다고 말하는 것처럼 외계 행성의 모습은 우리 사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완성도로 보자면 <카우보이 비밥>은 8년이 지난 지금 봐도 감히 따라오기 힘든 경지에 올라 있습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후에 등장한 최고의 애니메이션이라는 말이나, 이보다 더 완벽하게 음악과 어울리는 애니메이션을 본적이 없다는 평은 일견 당연해 보입니다. 느와르와 하드보일드 등 각종 장르를 넘나드는 연출력, 뛰어난 작화력, 뭐하나 빠지는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 그러나 무엇보다도 <카우보이 비밥>이 매력적인 건 사람사는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한 에피소드가 시작되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갑니다. 그저 “아, 별일 아니에요”라고 장난스레 내뱉고 난 뒤에는 알 수 없는 묵중한 기억 혹은 과거가 그들에게 달라붙어 있습니다. 무겁지 않은 듯 무겁고, 가볍지 않은 듯 가벼운 인물들은 짧은 에피소드 안에서 희노애락을 만들어 냅니다. 단순히 슬프다는 말 이상의 것들이 얼굴에 묻어 있는지를 따라가보면 각기 실픈 사연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카우보이 비밥>은 각기 인물들이 갖고 있는 상처들을 안고 있으면서, 나름대로 이겨내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때로 코미디가 되고 때로는 스릴러가 됩니다. <카우보이 비밥>속 인물들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지만 과거에 아직 풀지 못한 상처들을 안고 그것을 나름대로 풀어내려 합니다. ![]() 누구나 그렇습니다. 환하게 웃는 얼굴 뒤에는 어두운 과거와 아픈 상처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인데도 지금까지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상처들 말이죠. <카우보이 비밥>은 아픈 과거, 상처들을 간직한 이들이 만들어 내는 고백서이기도 합니다. 제트의 옛 애인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타락한 남자를 선택해야 하고, 페이는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해 단서를 찾아 나섭니다. 스파이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비셔스를 만나러 떠납니다. 이유는 "살아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것은 정리되지 못한 과거를 가지고 있으면 현재에 내가 살아있지 못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주제는 남녀의 진한 애정행각 장면이 없는데도 <카우보이 비밥>을 성인 애니메이션이라고 분류하는 연유이기도 합니다. 가끔 두서없이 한 편을 골라 봅니다. 어떤 이야기가 걸려들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고른 에피소드가 스릴러인지, 액션인지, 드라마인지, 코메디인지 알 턱이 없습니다. 그저 기분에 맞는 장르가 걸려들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그네들이 상처를 이겨내고 재미있게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고 나면 나도 모르는 여운이 "See you Cowboy"라는 하얀 자막 위에 남아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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