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건 몰라도 이건 확실한 것 같다. 지금 박찬욱은 가장 논쟁적인 영화를 들고 나왔다. 난 '디워' 이후로 이렇게 영화평이 극단으로 나뉜다는 이야기를 오랜만에 들었다. ‘극단적인 평가’. 영화 개봉 일주일 만에 '박쥐'를 설명할 가장 적절한 문장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박찬욱 영화가 JSA를 제외하고 대중적이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복수 3부작과 '싸이보그는 괜찮아'까지. 박찬욱은 대중적인 화법을 구사한 작품을 내놓은 적이 거의 없다. 흔히 박찬욱을 유명감독, 인기감독의 반열에 올린 '올드보이' 또한 빠른 전개와 대중적인 호흡법(장도리 액션, 빠른 편집, 악당-선 대결 등)을 가지고 만든 작품일 뿐이었다. 후반부에 나오는 진짜 진실 이야기는 앞선 대중적 관점에선 최악인 줄거리이다.
또 다른 생각도 든다. 박찬욱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재 감독 봉준호의 차이는 단순히 표현방식의 차이일 뿐인 건 아닐까. 이를테면 이렇다. 똑같이 '죄의식'이란 담론을 다루는데 봉준호는 몽화적인 내면 의식을 재치있게 보여준다. '괴물'에서 괴물에게 잡혀간 딸이 갑자기 매점에 나와 라면을 함께 먹는 장면이나, '살인의 추억' 마지막에 형사 일을 그만둔 형사가 화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형사의 표정 등등...

박찬욱은 어떨까. 박찬욱은 죄를 지었으면 내가 죄를 지은 대상이 내 바로 옆 침대에 나타나는 식이다. 돌려 말하지 않는다. 내면을 비추지도 않는다. 그저 내 눈앞에 보이고 만져지고 느껴진다. 죽였으면 그 죽은 자가 나타난다. 오감이 가진 가장 직설적이고 직접적인 자극과 현상 그 자체를 화면에 표현해 낸다. 우리가 박찬욱 영화에서 불편했던 것은 그 표현방식이 아니었을까.
박쥐에서 재미있는 건 상현과 태주 둘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보완적인 관계라고 할까. 상현이 누리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착점이라고 할까. 욕망과 신을 믿는 사제 사이를 갈등하는 상현. 그 대착점에서 온전히 욕망을 따르는 태주는 또 다른 상현의 모습은 아닐까.
또 '성기노출'과 김옥빈 노출만으로 '박쥐'를 마케팅하는 건 좀 비겁하다. 영화사나 제작자의 홍보전략 입김이 들어간 건 몰라도 그 외에 생각해 볼만한, 생각할 수 있는 꺼리들이 너무도 많다. 영화 속 상징들(죄의식, 구원이라 부르는 종교적 가치와 인간 본능의 대결, 개인 욕망과 공공 선의 갈등)과 언어들을 파헤쳐보기에 너무도 많은 풍성한 텍스들이 숨어있다. 어떻게 해석을 해도 가지치기가 가능한 장면들이 수두룩하다.
성기노출에 대해 한마디 더. 온갖 송강호의 성기노출에 관심이 많다. 솔직히 좀 짜치다. 길면 2초 3초간 나온 송강호의 거시기 출현은 자살 순교를 결심한 상현의 심리를 그대로 대변하는 장면이다. 혹시 아무 힘없는 성기를 바지춤으로 가리고 투벅투벅 걷는 장면 마지막에 슬쩍 웃음기를 머금은 상현의 모습을 봤는가.
좀 더 이해를 위해선 3번의 경리병원 장면을 봐야 한다. 첫 번째는 흡혈 능력을 얻은 상현이 붕대를 감고 나오는 장면. 병원 환자 부모들은 바이러스를 이기고 퇴원하는 상현을 붙잡고 늘어진다. "날 구원해 주세요" 라며(슬쩍 황우석이 오버랩되는 건 내 오버된 망상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팔을 뿌리치며 겨우 차를 타고 도망치는 상현. "난 당신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어요"라고 말하듯이.
두 번째 장면. 적당히 뱀파이어 능력을 얻은 상현은 갑자기 격리병원 앞마당을 찾는다. 사람들은 구원해 달라며 모이고, 갑자기 상현은 '폴짝' 하늘로 점프해 버린다.(앞을 보게 피 나눠달라는 선배 사제를 죽인 이후 상황) 이상했다. 다른 곳에선 절대 흡혈귀의 능력을 보이지 않던 그가 병원 앞 사람들 앞에선 거리낌 없이 하늘로 점프는 왜...

그리고 마지막 성기 노출 장면. 널부러져 모든 사람에게 성기를 보이고 뚜벅뚜벅 걸어간다. 날아오는 돌들. 슬며시 미소를 짓는 상현. 무엇을 의미할까. 난 이렇게 이해했다. 이것은 신성의 영역을 바라보는 인간들에 대한 직접적이고 확실한 절망을 표현하는 방법일 뿐이라고.
신성의 영역을 바라는 사람들에 대한 배신과 사제와 뱀파이어 사이의 갈등을 벌였던 자신에 대한 자학적 표현방식 일 뿐이라고. 그래서 좀 거북하지만 힘없는 성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상현의 마지막 순교, 죽음의 길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박쥐의 또 다른 대단함은 '공포' 묘사의 탁월함이다. 쓸데없이 뒤에서 슬며시 나타나 갑자기 사람 놀라게 하는, 싸구려 공포가 아니다. 이를 테면 이런 것, 옥빈이 남편 하균의 입에 대고 칼날을 들었다가 놨다를 반복한다. 카메라는 처음엔 옥빈의 손목 움직임과 똑같이 흔들린다.
두어번 흔들리더니 하균의 얼굴에 시선을 멈춘다. 입에는 계속 칼날이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한다. 3센티, 5센티만 더 들어가 힘을 주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순간. 바로 뒷화면이 어떻게 변화될지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나는 무척이나 무서웠다.
이 고단수 공포 속에서 간간히 사람을 웃겨버리는 힘은 또 뭘까. 그래 솔직히 이 영화. 뭐라 설명이 딱히 힘들다. 그게 박쥐다. 아니 그게 박찬욱표 영화다. 말도 안되는 상황 속에서 웃게 만드는 힘. 역설과 현실 속, 심각한 장면 속을 단 한 번에 뒤틀어버리는 대사들. "락앤락에 담아서 먹어야 돼", "자 오늘 시마이~", "언젠 귀엽다며, 시팔년아"
아무튼 다른 건 몰라도 지금까지 봤던 영화들 중에서 '영화적 체험'의 극단을 갔다 온 건 확실하다. 심장이 벌렁벌렁, 쿵쾅쿵쾅 뛰는 소리를 영화를 보면서 오랜만에 느꼈으니. 난 이 이유만으로도 박쥐는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ps. 카톨릭에서 왜 이 영화에 대해 코멘트를 하지 않을까. 문제가 되는 장면 무척이나 많은데.. 앞 좀 보게 피를 나눠달라는 선배사제와 상현의 대사가 특히 그렇다. 그냥 덧붙여 말하면 피 나눠달라는 선배 사제를 죽였을 때 상현은 피를 도덕적으로 먹어보려하는 노력들(병원 바닥에 누워 비를 빠는 장면)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된다. 그의 개인적 파멸이 이 때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도 있겠다.
ps. 박쥐의 강렬함을 다시금 느끼고 싶다면, ‘복수는 나의 것’을 꼭 보시길 바란다. 죄악 - 선 - 악의 뒤틀림은 물론, 송강호가 이토록 무서우면서도 건조한 표정의 미묘한 얼굴을 가진 섬뜩한 배우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 ps. 김옥빈이 이런 배우인 줄 몰랐다. '팜므 파탈'이란 단어를 온전히 설명해 낸다. "자살한 사람피나 빨아먹는주제에.." 라고 말할 땐 소름이 쫙.. 나쁜 건 아는 데 거부할 수가 없는. 그런 오묘한 느낌. 아무튼 대단하다. 감탄했다.
덧글
저는 다른 거 떠나서 이 영화를 참 재미있게 봤는데, 이글루스에는 말 그대로 양극단의 평가들이 양립하고 있어서 점점 헷갈리기도 해요. 그래도 이 논쟁 자체가 재미있어서 영화 보고 난 다음에도 줄곧 주목하고 있는 중입니다 ㅋㅋ
신하균이 죽기 전까지는 김옥빈이 마작판에 끼어들기는 커녕 과일이나 깎아오는 신세였는데 남편 신하균이 죽고나니 태연히 마작판에 끼어드는 모습이며, 엄마/시어머니의 지목에 능청스레 반응하는 장면이며... 연기자로서 잘 빚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신체의 극히 작은 부분으로 광기어린 연기를 보여준 김해숙씨의 연기가 좀 더 우위였다고는 생각됩니다 송강호, 김해숙 등 명배우들 사이에서 김옥빈도 묻히지 않고 연기를 잘했죠.
사랑하는 엄마이자 증오스런 시어머니라는 (김옥빈과 김해숙의) 관계과 인상적이기도 했구요.
강론 때 언급하는 경우도 있지만, 공식적인 입장에서 '저건 사탄의 산물이야!!'어쩌고 하며 뭐..수입반대운동을 한다거나, '주여 저들을 멸하소서'어쩌구 쇼를 벌이진 않았죠-_-
박쥐의 경우는 종교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긴 한데, 그게 너무 나가다보니 가톨릭 측에선 뭐라 반박할 가치도 없다고 느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전 박쥐를 참 감명깊게 봤지만요.
그리고 상현의 캐릭터도 참 모호했고요. 만일 그의 사제의 입장이 더 강조되고, 종교적 신념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들이 더 구체적으로 그려졌다면 한 소리 들었을지도요.
하지만 상현이 사제라는 설정은 영화 상에서 '설정'의 역할만 했지, 가톨릭 신자들이 보기에 그들의 민감한 부분까지 건드릴만큼 파고들진 않았기에 비난할 거리가 별로 없을 것 같기도 해요.
참고로 전 나이롱 가톨릭 신자랍니다;
전 전혀 무섭지 않던데.. 오히려 확 찌르지 못하고 땀 뻘뻘 흘리며 넣었다 뺐다만 반복하는 그녀가 더 안스럽지 않던가요?
무섭다면 오히려
죽었던 신하균이 그녀의 환상속에 부활해서 눕혀놓고 입속에 가위를 넣었다 뺐다 하는 모습일 겁니다. 신하균의 미친듯한 얼굴과 함께, 정말 공포스러웠죠.
보통, 다른 공포영화에서는, 이유없이 그냥 죽이고 자르고 그럽니다. 악역들은 원래 그렇기 때문이고, 원래 그런거 즐기는 것들이지, 그들에 대한 별 이해는 없어요.
하지만, 여기서는, 그것도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죠. 그래서 공포도 희석됩니다. 송강호는 별로 무섭지 않구요.
하지만, 곳곳에 그의 폭력성이 비집고 나오는데,
김옥빈 목조르는 장면이나, 아버지같은 신부를 죽이는 장면, 태주를 탐했던 적이 있는 오아시스 멤버들을 잘라서 걸어놓으라고 차분히 조언해주는 장면등은
깜짝 놀랄만큼 표면적이던 그의 모습과 다르게 이질적이고 그래서 공포스럽죠.
상현이라는 캐릭터는
남을 돕고자 하는 의지를 시종일관 보여주고는 잇지만
행동으로는 자기자신만을 위하면서 입으로는 그런 자신을 변호하기에 바쁜 존재였죠.
굳이 신도들의 환상을 깨지 않아도 될 것을..
(마음의 문제라고 처음에 누차 말하던 상현을 생각해보면.. 설령 그가 진짜 구원자는 아니더라도 그를 구원자로 믿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믿음으로써 병을 고치는 기적도 있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렇다면 그들앞에서 날아오르는 모습까지만 보여주고, 여자나 탐하는 자신의 진짜 치부는 드러내지 않는 것이 신도들을 돕는 것이죠. 진실이 어쨌건, 신도들은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것을 믿음으로 기적도 얻을 수 있을 거에요. 하지만 송강호는 그걸 산산이 깨버리죠. 굳이 자기가 죽으러가기전에 일부러 들러서.)
상현은 더이상 숨고 싶지 않았고, 다른 이들을 생각해보겠다는 위선따위는 이제 그에게 일말의 가치도 없게됩니다. 처음에 자신의 캐릭터..자신을 희생해가면서까지 누군가를 구하는 일에 쓰여지겠다던 그 위선..을 벗는 그것에만 집중하는 거죠. 사람들의 경악과 돌팔매를 견디며 웃고 나오는 것도 그때문이구요.
이 자기배반적이면서 놀랍게 차갑고, 폭력적이면서 강한 욕망의 캐릭터인 상현에 비해
태주는 폭주할 듯 할 듯 하면서 못하고 주저앉고 마는 캐릭터입니다.
공포는 상현이나 상현과 태주의 죄의식, 혹은
궤뚫어보는 소름기치는 나여사의 눈길에서 오지
태주한테서는 보기가 힘들어요. 차라리 그녀한테서는 해방감과 유쾌함이 느껴지죠(상현에게서 쓴웃음이나 코웃음이 나는 것과는 반대로)
하지만, 늘 상현에게 발목잡히고, 스스로 만든 굴레에서 결국 못빠져나오는 모습인 태주. 답답합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명제를 사이에 두고
상현과 태주는 서로 꼭 들어맞는 짝이기도 하구요.
독고구패 / 김옥빈 팬이 됐습니다. 정말로.
태리 /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군요. 해석 감사합니다.
1 / 우와... 해석이 더 깔끔하고 멋지신데요... 우오. 감탄...
사실 박쥐를 보고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캉을 읽었는데요
소설 특유의 분위기와 박찬욱 센스가 잔뜩 버무려진 영화라고 생각드네요.
영문제목인 Thirst라는 타이틀이 마음에 후벼파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요??
김옥빈도 김옥빈이었지만 라여사를 분한 김해숙분의 포스가 인상깊더군요